[메디소비자뉴스=방원석 발행인] '영원한 배구인' 故 송만덕 한양대 배구감독이 별세한지 오는21일로 9주기를 맞는다. 

강산이 한번 변한다는 세월이 깜짝할 새 흘렀다. 나는 지난1990년대 초 중앙일보 체육부 배구기자로 취재 현장을 누빌 때 모든 종목을 통틀어 한양대 배구팀을 대학부는 물론,성인무대까지 제패했던 전무후무할 명문팀으로 기억하고 있다.

한양대를 정상의 명문팀으로 키운 리더십의 중심에는 고 송 감독이 있었다.그는 지도력과 열정,승부욕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워낙 업적이 컸던 탓에 앞으로 대학감독으로선 어느 누구도 그와 같은 위업을 쌓기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무엇보다 최근 무기력해진 배구판을 지켜보면서 당시 고 송 감독의 뜨거웠던 열정과 투지,탁월한 지도력이 더 그리워진다.

당시 배구기자로 함께 코트에서 취재경쟁을 벌이며 동고동락하던 김학수 한체대 스포츠 언론정보연구소장<사진>이 최근 한 일간지에 고 송 감독을 기리는 칼럼을 게재했다. 김 소장은 당시 일간스포츠 배구담당 기자로,고 송 감독과 호형호제할만큼 각별했다.  

김학수 <한체대 스포츠 언론정보연구소장>

그에 대한 기억이 갑작스레 떠오른 것은 최근 일련의 내 주변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옛날을 생각나게 하는 여러 일들이 있었다. 지난주 금요일. KBS 2TV에서 미니시리즈로 방영한 휴먼다큐멘터리 ‘인간극장’에서 소개된 국내 최초의 소울가수 박인수(65)의 곡절많은 인생이야기의 마지막편을 아내와 함께 봤다.

1970년대 독특한 창법으로 ‘봄비’를 크게 히트시켰던 박인수가 불우한 어린 시절과 불행한 가정생활을 거쳐 췌장암 수술과 치매로 어려움을 겪다 유일한 아들과 아내를 30년 만에 다시 만나 재결합하는 이야기는 가슴뭉클한 감동을 주었다.

‘봄비’에서 받은 감동의 여운을 안고 다음날 충북 영동으로 갔다. 삼성화재배 대학배구연맹전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대학연맹 부회장으로 개막식에 참석한 뒤 영동의 특산물 와인을 시음하는 ‘와인코리아’에서 만찬이 있었다. 옛 초등학교 건물을 리모델링한 와인코리아 건물은 산허리를 휘감아 도는 주변의 경관과 잘 어울렸다. 초등학교가 아름다운 와인집으로 변한 것은 아주 운치있는 모습이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배구인들과 함께 대학배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같은 차에 탄 김남성 전 성균관대 감독이 그에 대한 추억을 되살렸다. 8년 전인 2004년 6월 58세의 나이로 타계한 고 한양대 송만덕 감독이다.

1980년대부터 2000년초반까지 한양대 감독과 현대캐피탈 감독, 애틀랜타 올림픽 대표팀 감독 등을 역임하며 남자배구의 최고 사령탑으로 활약했던 이였다. 김남성 감독은 “당시 한양대와 성균관대가 대학배구의 양대 라이벌로 배구 인기를 주도했다. 배구 선배이기도 한 송만덕 감독님은 배구계의 거목이었다”며 “남자배구의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공헌하시며 많은 일을 했던 분이셨다”며 회상했다.

송만덕 감독은 내가 지금까지 만난 체육인들 가운데 가장 많은 시간을 같이했고 가장 정을 많이 주고 받은 지도자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 직전 처음 만났던 송만덕 감독은 친형제같이 편안하게 대해주며 배구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 등을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송만덕 감독을 통해 배구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됐으며 이후 줄곧 배구 취재의 끈을 놓치 않았다. 송만덕 감독이 워낙 배구계에서 많은 활동과 업적을 쌓아 이를 보도하는 기자로서도 많은 취재거리가 생겼다.

하종화, 윤종일 쌍두마차를 앞세워 1991년 대학팀으로서 사상 처음으로 성인배구를 제패했으며 유니버시아드 대표팀 감독, 애틀랜타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지냈고 대한배구협회 강화위원장, 대학배구연맹 전무이사 등을 역임했다. 경기인으로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송만덕 감독은 선배나 후배들에게 기꺼이 베풀 줄 아는 인간적인 사나이였다. 갖고 있는 시계나 옷을 선후배에게 선뜻 주기도 했으며 소주잔을 기울이며 고민을 함께 나누기도 했다.

송만덕 감독은 암으로 타계하기 전까지 기자였던 나와 친형제 못지않게 지냈다. 내가 쓴 기사를 항상 스크랩했고, 특히 한양대 기사는 반드시 학교 관계자에게 가장 먼저 알렸다. 때로는 기사에 대해 칭찬을, 또 가끔은 따끔한 충고를 하기도 했다. 일부 기자들 사이에서는 송만덕 감독이 나만을 편애한다며 질투와 시샘을 하기도 했으나 그는 그러한 지적 등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끈끈한 정과 의리를 보여주었다.

몸을 사리지 않고 배구에 대한 열정을 쏟았던 송만덕 감독은 한마디로 배구를 위해 태어나 배구를 끝까지 좋아하다 세상을 떠난 ‘영원한 배구인’이었다. 초등학교 지도자로부터 시작해 중‧고, 대학, 성인배구팀 지도자까지 차례대로 맡으며 많은 후배와 제자들을 배출한 송만덕 감독은 타계할 때까지 배구에 대한 사랑의 끈을 놓치 않았다.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까지 대학연맹 관계자들을 병실로 불러 “대학배구를 잘 이끌어 달라. 대학배구가 잘 돼야 한국배구가 산다”고 말했다. 자신의 생명이 꺼져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대학배구의 잉태를 더 걱정했던 것이다.

송만덕 감독의 영결식장에서 조사를 읽은 나는 요즘 그가 떠난 빈 자리를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프로배구까지 출범해 배구의 인기가 높아졌으나 정작 배구의 질적인 수준이 향상됐는지는 의문이다. 지난 2004년 아테네올림픽과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 연속 2회 본선진출에 실패했고,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국내 배구의 현실 속에서 그처럼 배구를 위해 열성을 쏟아낸 참다운 지도자의 부재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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