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사태가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유럽 전역은 물론 전 세계 금융시장을 요동치게 하고 있다. 위기의 핵심은 과연 그리스가 재정위기 속에서 국가파산을 하지 않고 만기가 돌아오는 국가채무를 무사히 갚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특히 1997년 말 외환위기로 국가파산 직전까지 몰렸다가 IMF 구제금융을 받아 간신히 회생한 경험이 있는 한국으로서는 최근 벌어지고 있는 그리스 사태의 전개에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다.

외국 언론은 외환위기 당시 한국 국민이 보여준 ‘금모으기’와 같은 행동과, 현재 그리스 국민이 보여주는 실망스런 모습을 비교하면서 그리스의 염치없음을 질타하기도 한다. 그런 때면 과연 한국 국민은 똑똑하고 책임감 있다고 자부심을 느끼게 되지만, 한편으로 왜 그리스 국민은 무책임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그리스 사태의 근본적인 책임 가운데 상당 부분은 물론 그리스 국민에게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유로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유로화는 경제상황이 상이한 유럽의 여러 국가들을 하나의 통화로 묶는 시스템이다. 즉, 국가마다 경제성장률이나 물가수준이 다 다르지만 한 가지 통화에 동일한 금리를 적용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상황에서 성장률이 하락하거나 물가가 상승하는 경우 국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재정정책을 통해 경제 안정을 도모하는 방법이 유일하다.

금리조정 같은 통화정책에 관한 한 개별 국가의 재량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2008년과 같은 글로벌 금융위기로 대규모 재정지출을 단행한 이후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경제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재정을 통해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미 정책당국이 쓸 수 있는 카드를 다 써버린 후에 발생하는 경제위기는 그야말로 ‘외환보유액’이 바닥난 상황에서의 ‘외환위기’처럼 무서운 것이다.

과거 그리스 국민들은 경제상황에 비해 턱없이 낮은 금리와 풍부한 유동성이 제공되었던 유로화 시스템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독일이나 프랑스와 같은 선진국에게 적용되는 낮은 금리를 상대적으로 경제가 취약한 그리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하다보니 그리스의 투자가 활성화되고 자산 가격도 크게 올랐던 것이다.

개인들도 낮은 금리로 대출을 받을 수 있어 소비를 마음껏 늘릴 수 있었다. 그러나 국내생산이 뒷받침되지 않은 채 늘어나는 소비는 결국 경상수지 및 재정수지 적자로 이어져 그리스의 경제 기초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재정이 더욱 취약해졌다. 개인들 입장에서는 과거에 돈이 남아 마구 빌려주더니 어느 날 갑자기 구조조정을 한다고 고용을 줄이고 임금을 삭감하며 연금을 축소한다는 식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경제시스템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대부분은 자신의 입장에서 이해 가능한 범위 안에서 경제적 의사결정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 국민들의 격렬한 항의는 이해되는 면이 있다. 과거에 낮은 금리로 돈을 빌려준다고 해서 대출을 받아 소비한 것뿐인데 이제 와서 그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책임을 지라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 하는 문제이다.

개인들은 주어진 경제상황에서 합리적으로 행동했지만 시스템 전체로 보면 부작용이 나타나게 되는 이른바 ‘구성의 오류’가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 사태의 책임을 전적으로 개인에게만 돌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유로존 국가라면 모두 그리스와 같이 경제정책의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와 유사한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태생적으로 구성의 오류를 안고 있는 유로화 시스템을 개선하지 않을 경우 그리스처럼 비난받는 다른 국가의 국민들이 또 나타날 수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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