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보험 재정 적립금이 20조원을 돌파했다.

건강보험공단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건보재정은 올들어 지난 8월 말 현재 수입 37조7387억원, 지출 34조5421억원을 기록해 8개월동안 3조1966억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이로써 흑자 누적액이 20조1766억원으로 늘어났다. 건보재정이 지난 2011년 처음 1조6000억여원의 흑자를 나타낸 이후 거의 5년 만에 20조원이 넘는 돈을 쌓아놓게 된 것이다.

이같이 건보재정 흑자가 늘어난 것은 의학기술의 발전, 건강검진 확산 등으로 질병 조기 발견과 치료가 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당국의 설명이다. 또 경기 침체에 따라 병원 치료를 기피함으로써 건보급여의 지출증가 속도가 감소한 것도 한 원인으로 지적됐다.

그러나 이보다는 건강보험 가입자들로부터 건보료 징수를 매년 늘리는 대신 급여 지출을 줄인 것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닌가 싶다. 지난 2011년 5.64%였던 건보료율은 2012년 5.80, 2013년 5.89, 2014년 5.99, 지난해에는 6,12%로 매년 증가했다.

반면 건강보험에 따른 의료혜택 보장률은 2009년 65.0, 2010년 63.6, 2011년 63.0, 2012년 62.5, 2013년 62%로 해마다 줄었다. 2014년에야 4대 중증질환자에 대한 보장률을 강화한 탓으로 63.2%로 보장률이 다소 높아졌을 뿐이다. 건보 보장률이란 전체 의료비 중에서 건보재정의 급여비가 차지하는 비중이다. 말하자면 건보흑자 적립금 20조원은 거둔 돈은 많고 의료보장률을 낮췄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이야기다.

정치권과 의료계 일각에서는 이 때문에 쌓아둔 적립금으로 건보 보장률을 획기적으로 높이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또 일부에서는 건보 가입자들이 부담을 낮추자는 의견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건보 적립금 운영에 대해서는 더 신중한 검토가 있어야 한다.

건보 흑자 적립금 20조원은 건보급여비 1년 지출액의 겨우 30%를 넘어서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 것이다. 또 국내 의료 수요는 노인인구의 증가와 고령화로 진료비 부담이 급증하고 있는 형편이다. 반면 저출산으로 경제활동인구는 매년 줄어들어 건보료를 부담하는 인구는 감소하고 있다. 겨우 흑자로 돌려놨는데 이를 당장 쓰자고 하면 미래 의료급여비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랙시트)가 사실상 의료서비스 불만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영국은 인구의 노령화로 의료비가 매년 4%씩 증가했다. 이에 비해 보험 예산 증가율은 0.8%에 그쳤다. 여기에 최근 난민들의 의료수요가 늘어 도저히 의료비 부담을 할 수 없었다. 수술 대기자는 한계치인 300만명을 훨씬 넘어서 390만명에 달했다. 건강보험체계의 붕괴는 눈앞의 일이 됐다. 건강보험을 더 이상 실시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친 것이다. 이것이 브랙시트의 직접적 원인이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눈에 보이는 적립금을 어떻게 쓸 것인지를 궁리만 할 일이 아니다. 미래의 의료 수급을 예측해 장기적인 보험재정 관리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래야 건강보험 체계의 붕괴를 예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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