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가 제약 광고인으로서 자존감이 가장 높았던 시기였지요.”

80년대 대웅제약 광고부장을 지내며 제약업계 광고시장을 한때 호령했던 이래성(72)씨는 이렇게 당시를 회상했다.

‘구락부’란 말은 본래 ‘클럽(club)’이라는 일본식 발음을 한자음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구락부’의 본 뜻은 주로 문화ㆍ오락ㆍ체육ㆍ사교 등의 목적을 가지고 조직된 사람들의 단체를 일컫는다.

또 ‘구락부’는 남산에 있는 ‘외교구락부’처럼 모임이 있는 장소를 뜻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구락부’란 말은 요즘 중ㆍ장년층 외에는 잘 쓰지 않는다. 젊은층에서는 직접 ‘클럽’이란 외래어를 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1970~80년대 초만 해도 ‘PR 구락부’란 것이 있었다. 제약, 화장품 광고 담당자들의 친목임이었다. 회원들은 주로 동아제약, 유한양행, 종근당, 일동제약, 동화약품, 대웅제약,한독약품 등 18개 상위 제약회사에 태평양화학과 한국화장품 등 2개의 화장품 회사를 더해 총 20개사로 구성됐다.

분기에 한번 종로구 관철동에 위치한 대한약품공업협회(한국제약협회의 전신)에서 모임을 가졌다.

말하자면 지금의 한국제약바이오협회 홍보전문위원회 성격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홍보전문위원회가 제약협회의 정식 기구는 아니지만, 회원사 홍보 담당자들의 친목과 정보교환의 역할을 하고 있는,바로 그런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 PR 구락부는 단순 친목 모임 이상의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

신문사에서 광고 단가 인상 문제를 협의할 때 협상 대상이 바로 PR 구락부였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만 해도 제약광고가 신문광고 물량의 60%를 커버하던 시절이어서 제약광고가 꽤나 대우를 받던 시절이었다.

대학에서 광고를 전공한 필자의 첫 직장이 대웅제약이었는데, 1982년 입사당시 최종 면접을 통과한 2개의 회사 중 나의 선택 기준은 연간 광고 집행금액이었다.

1981년 전 산업계에서 광고 집행금액 순위가 1위 태평양화학(현 아모레퍼시픽), 2위가 삼성전자, 3위가 대웅제약이었다. 나는 주저없이 대기업인 농심 입사를 포기하고 대웅제약을 택했다.

당시 제약광고의 광고 파워가 얼마나 강했던지 제약광고의 광고 단가 인상률이 결정되고 나면 다른 산업계가 눈치를 보다가 광고 단가를 인상하곤 했다.

PR 구락부가 불황을 이유로 단가 인상 동결을 선언하면, 이듬해 전 광고업계의 광고 단가 인상은 동결로 이어졌다.

해마다 연말이면 종로구 관철동 대한약품공업협회 회의실에서는 새해 광고단가 인상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PR 구락부 회의가 열렸다. 장안의 언론사 광고담당자들은 이 회의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회의실 앞 복도는 언론사의 광고 담당 데스크들이 직접 나와 진을 치고 회의 결과를 기다리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회의가 끝나고 회의실 문이 열리면 이들은 우루루 몰려들어 광고 단가 인상 결과를 알아낸 뒤 회사에 보고하러 앞다퉈 인근 공중전화 박스를 찾았다.

광고 단가 인상 관련 에피소드 한 토막-.

1970년대 말, 한 유력 경제신문이 연중에 단독으로 PR 구락부에 광고단가 인상을 신청했다.

PR 구락부는 이 신문사의 단가 인상안을 단칼에 부결시켰다. 해당 신문사는 난리가 났다. 신문사가 은밀히 조사에 들어가 모 화장품회사가 단가인상안 부결을 주도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다음날부터 사회면에 박스 기사로 이 화장품 회사를 상대로 소위 ‘조지는’ 기사를 시리즈로 내보냈다.

해당 회장품 회사는 발칵 뒤집어지고 회장까지 해결사로 나서 파문은 조기에 일단락됐지만, 이 사건은 후에 광고 담당자들의 입에서 두고두고 회자됐다.

이제는 격세지감이 된 느낌이다.

1970~80년대 초만 해도 우리나라 광고산업계에서 제약광고가 차지하던 비중이 1위를 차지했으나,요즘은 세상이 달라졌다.

제약계 광고 비중은 2017년 방송광고비 기준으로 금융, 정보통신, 서비스, 식품, 음료에 이어 6번째로 주저앉았다. 대학생 취업 선호도도 제약계가 1위에서 지금은 다른 업종보다 한참 뒤처져있다.

제약산업이 이렇게 밀리게 된 이유는 정부의 계속되는 약가인하 정책으로 인해 수입약, 카피약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제도적인 탓도 컸지만 그간 리베이트 사건 등 제약업계 스스로가 이미지를 실추시킨 탓도 크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새해가 시작됐지만, 제약업계는 여전히 춥기만 하다.

위상이 예전만 못하고 예산은 쪼그라들고 매체 요구는 갈수록 늘어나고, 제약사 광고홍보 실무자들은 해만 바뀌면 그야말로 죽을 맛일 것이다.

제약판 광고홍보 선배들은 예전에 가슴 속 깊이 '자존감'을 간직하고 온갖 간난신고를 물리쳤다.

부디 후배들도 선배들의 그 '자존감'을 되새겨 7~80년대 '제약광고의 영예'를 되찾아 주시기를 기대한다.<올리브애드 대표>

◇필자 약력

중앙대학교 광고홍보학과 및 동 대학 신문방송대학원 졸업

대웅제약 광고과장

한미약품 홍보이사

광동제약 홍보상무 및 마케팅 본부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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