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어느새 ‘제국의 황제’가 되어 있었다. 과연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되는 것인지...그를 보면 답이 나오고 세상이 보인다.

한미약품 임성기회장<사진>. 1940년생이니 고희를 넘겼다.

35년전 내가 재수하고,대학다닐때 동대문구 창신동에서 청년약사였던 그를 자주 봤다. 그냥 친절하고 인상이 좋아보였던 그가 임성기였다.

그는 제약업계에서,국내 재계에서,그로벌기업에서 굴지의 기업을 일궈내는 금자탑을 쌓았다. 40여년전을 되돌아보니 바로 그 약사가 지금은 범접하기 힘든 기업의 총수로 대성해 있었다.

그가 약사로 안주했더라면 자기앞길만 챙기는,그저 평범하고 무명의 약사로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70년대 초반 동대문시절의 임성기약국으로 되돌아갔다. 지하철 1호선 동대문역에서 내리면 목좋은 지하철 출입구에 그가 운영하던 임성기약국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의 성공에는 몇가지 떠오르는 대목이 있다.

그가 약국을 운영했던 20대 후반~30대 초반 그 시절의 청년약사가 인생이든,사업이든 얼마나 알 나이인가.

그런데 임회장의 피에는 뭔가 다른게 있었던 것 같다. 청년약사 임성기는 창신동에서 약국을 운영하면서 성병만을 주로 다루는 약국으로 특화시키는데 성공했다.

약국 바로 뒤 청계천 8가에는 일제시대부터 내려오는 유명한 사창가가 있었다. 윤락녀,젊은  한량들이 사창가를 드나들면서 성병에 걸리면 곧바로 임성기약국을 찾았다. 그는 고객이 흐르는 길목을 지켰다.

당시 대한민국에서 성병은 임성기약국으로 통했다. ‘성병=임성기약국’. 마케팅도,신문광고도 그렇게 했다. 그래서 성병에 관한한 임성기약국이 국내 최고의 전문약국,전문약사로 이미지가 포장됐다.

지방에서도 상담하러 올라왔고,귀대하던 군인들도 약국에 들려 약을 사갈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고객이 구름처럼 몰려 여기서 번돈이 후일 사업밑천이 됐다는 후문이다.

이를 보면 그의 핏속에는 애당초부터 약사 그릇이 아니라 ‘사업가’ DNA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40년후. 기업은 오너 그릇만큼 큰다고 했던가. 그의 오늘을 있게 한 치밀함,판단력,추진력,돌파력,부지런함은 재론의 필요가 없는,거추장스런 수사들일뿐.

무엇보다 성공요인을 더 추가한다면 그의 서민적 겸손함을 들고 싶다. 지금도 총수로서 누려야할 ‘귀족의 벽’을 스스로 낮추고 있다. 이는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서울 방이동에 우뚝 서있는 한미약품 본사빌딩에 들어가 임직원들을 만나면 회장의 체취,스타일이 그대로 느껴진다.

간부,직원들은 ‘NO’라고 말하지 않는다. 회장실은 열려있다. 회장이 누구나 만나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차별하지도 않는다. 비서실은 온화하고 따뜻하다. 외부인에게 그렇게 비쳐진다.

어떤 생각으로 도전하고,처신하고,이겨내고,주위의 도움을 받느냐...우리는 평범한 일개 약사에서 기업총수로 탈바꿈한 임회장의 때론 고단했고,때론 화려했을 40년 발자취에서 인생의 길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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