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전 새한그룹 워크아웃 幕前幕後③>

외부인사 영입으로 촉발된 갈등과 분란

1999년12월초 어느날,박창학 홍보이사가 이재관 부회장을 면담하고 오더니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있었다. 박이사는 중앙일보 편집부장을 지내다 새한그룹이 출범하면서 나와 함께 새한그룹 임원으로 ‘스카우트’된 언론인출신이다.

박이사는 “이부회장은 새로운 여성 홍보임원이 올 예정이라면서 퇴임을 요구했다”고 했다.그러면서 “조만간 나도 부를 것”이라고 전했다.

이부회장이 박이사를 경질하기에 앞서 홍보실 과장급 여간부를 느닷없이 엉뚱한 부서로 발령냈다. 과거에는 이 여과장을 하루가 멀다고 불러 업무 보고 받더니 갑자기 인사발령을 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실 여과장 인사는 여자 홍보임원을 데려오기위한 사전 정지작업의 전주곡이었다. 여자임원과 비슷한 또래였던 그 여과장을 미리 다른 부서로 옮겨 마찰과 알력의 후폭풍을 미리 없애자는 심산이었던 것.

갑작스런 인사로 황당해했던 그 여과장에 대한 인사배경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게 후일 알려졌다. 새한의 최고 경영진으로부터 그 여과장의 인사가 오너의 가족과도 관련 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듣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이어진 홍보실 인사의 타킷이 박창학 이사였다.

"오라고 할때는 언제고 내칠때는 언제인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이부회장의 경영 스타일이 원망스러웠다

사실 이날 이부회장의 박이사 경질‘통보’는 별로 놀랄 일도 아니었다.   나는 올것이 오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이사는 이부회장에게 “말미를 달라”고 했지만 비교적 담담한 표정이었고,나갈 채비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30대 후반의 여자 홍보임원이 온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소문에 불과했고,확인할 수도 없었다.

어느날 내가 업무차 인사담당 유필상 이사에게 갔더니 그는 “인사 때문에 골치아파 죽겠다”고 했다.

당시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감’을 잡지못했다. 훗날 이부회장이 이 여자임원을 영입할 예정이니 인사발령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던 사실을 알았다. 당시 유이사는 입장이 곤란해 차마 나에게 이 얘기를 하지 못한 것이다.

새천년이 오기 직전인 1999년12월24일,그 여자상무는 사내반발속에 발령받아 출근했다. 회사는 임직원들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한듯 그 여자임원을 홍보실이 아닌 회장실옆 사무실에 두고 근무시켰다.

삼성출신,제조업...새한 임직원들의 강한 자존심은 허탈,좌절로 무너졌다.

영입후에도 논란과 사내반발은 계속됐다. 임직원들은 틈만나면 이부회장에게 직언을 서슴치않았다.

가까운 참모들은 앞다투어 부적절한 인사라고 이부회장을 설득했지만 이부회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부회장의 측근이었던 새한개발단 김문규단장조차 이부회장에게 업무보고하는 자리에서 “부회장님,월급쟁이 생활한 경험이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인사하면 조직이 무너지고 직원들은 참담함과 좌절을 느끼게 됩니다”라고 충언했다.

이에 아랑곳않고 이부회장은 여자상무에게 우선 회사 IR업무를 맡겼다. 이부회장은 여자임원이 IR전문가여서 당시 날개없이 추락하던 새한 주가를 3~6개월내에 두배까지 끌어올릴 것이라고 장담하면서 반발여론을 잠재웠다.

이부회장은 겉으로는 여자임원 영입의 당위성을 주가올리기에서 찾았다. 그 여상무는 몇 개월간 이부회장의 최측근으로,이부회장 바로 옆방에서 근무했다. 그녀를 홍보실에서 근무시키지 않았다.

반발여론이 수그러들지않자 이부회장은 나를 직접 불러 설득했다.

2000년1월31일 월요일 오후. 이부회장과 내가 이부회장 방에서 마주앉았다. 나는 그와 1시간 가량 독대했다. 이부회장은 그때서야 여상무 영입의 배경과 이유를 설명했다. 귀가 번쩍 뜨이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부회장은 영입한 여상무가 큰 역할을 할거라면서 “여상무는 현직 정치 실력자의 수양딸로,그를 한달에 한번정도 집을 방문할만큼 가까운 사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녀가 새한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을 것”이라고 힘을 주었다.

“내가 그 정치실력자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보다 여상무를 활용하면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나름대로 여상무의 활용방안까지 밝히면서 나를 설득했다. 이부회장은 여상무가 마치 회사를 위기에서 구할 새한의 ‘잔다르크’로 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여상무가 홍보실에 오더라도 방부장과 여상무의 역할이 다르니 언론담당은 계속 방부장이 맡아달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당시 마포 공덕동에 있는 새한 빌딩 4층에는 낯익은 정치인들이 들락거렸다. 그곳에 바로 그 정치실력자의  연락사무실이 있었던 사실을 나는 뒤늦게 알았다. 그 연락 사무실은 홍보실과 같은 층을 사용하고 있었다. 우연히 낯익은 인사들과 화장실에서 자주 만났다.

그 정치실력자는 1997년 대선당시 민주당 김대중 총재의 선거를 도와줘 고위직을 지내고 있었다.

이 사무실을 들락거렸던 낯익은 정치인도 장관으로 입각됐다.

이렇듯 새한그룹과 이 정치실력자간에 사적인 채널이 암암리에 있었다. 여상무 영입후 그 실력자와 새한 오너가와 '관계'의 일단이 드러났는데,이부회장이 그 실력자를 판건지,여상무가 그 정치인의 수양딸이라고 과장해 떠벌린건지,지금도 모른다.

무엇보다 이부회장은 삼성에서 분리된 제일합섬 출신 임직원들을 평소에도 매우 불신했다. 그래서 회사가 제일합섬과 새한미디어가 통합돼 새한그룹으로 새로 출범했지만 이부회장과 새한 임직원들의 관계는 마치 물과 기름같이 겉돌았다.

제일합섬은 원래 이부회장의 아버지인 고 이창희 새한미디어회장의 몫이었다. 삼성그룹이 재산분가 차원에서 1995년 제일합섬을 삼성에서 분리시켰다. 그때 제일합섬 임직원들이 삼성에서 분리되는것을 거세게 반대했고,이를 계기로 새한 임직원들을 싫어하게 됐다는 내부분석도 있었다.

이날 나와 마주 앉은 자리에서 이부회장은 이같은 새한 임원들에 대한 가슴속 불만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삼성그룹시절 제일합섬(새한 전신)은 과거 삼성그룹 비서실이 모든 업무를 처리해줘 능력이 떨어지고 인재도 없습니다.”

이어 “새한의 관리 스태프들 일부가 지금도 조직적으로 반발하고 있다”며 새한 핵심 임직원들을 그냥 놔두지 않을 태세였다.

이런 발언으로 미루어 그가 얼마나 새한 임원들을 불신하고 싫어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며느리가 싫어지면 발뒷꿈치부터 싫어진다고 했던가.

이부회장은 새한의 임직원의 일거수 일투족 모두 못마땅해 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이부회장은 여상무 영입의 인사파동이 있기전 대학(고려대) 은사라는 현직 교수를 고문으로 영입했다. 그 모교 은사가 여상무와 다른 임원을 함께 새한그룹에 데려온 것이다.

그후에도 인사로 빚어진 갈등과 알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외부인사의 영입을 계기로 임직원들사이에서 이부회장을 대놓고 성토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이부회장은 새한 임원들을 불신한나머지 임직원들의 조언에는 관심없고,밖에서 영입한 경영진들만 신임했다는게 내부의 시각이었다.

‘분식회계를 해야 한다’는 조언도 외부인사들의 입에서 나왔고,이를 거부한 새한 임원들의 문책인사도 여기서 나왔다는 설이 파다했다.

경영지원실장이 분식회계 지시를 거부하자 이부회장 곁을 지켰던 외부인사들은 “수천억원정도의 분식회계는 다른 기업도 한다. 관례다”라며 이부회장을 부추겼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사내에서는 이부회장이 외부인사를 경영진으로 데려온 것은 1999년말부터 사내에서 제기된 워크아웃설에 대한 불안감으로 경영권 등을 보호를 받기위한 고육지책이었다는 루머도 함께 나돌았다.

회사 분위기는 어수선했고, 나는 그해 4월말 회사를 떠났다.

2000년5월 어느 일요일. 최대표는 회사 분위기를 일신한다며 임원들을 불러 일괄 사표를 받았다. 이부회장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최대표는 이부회장이 데려온 여자임원 등 일부 외부세력의 사표를 전격 선별 수리했다. 인사파동은 막을 내렸다.

그후 최대표가 나를 불렀다. 최대표는 나에게 홍보이사를 줄테니 돌아오라고 요청했다. 나는 개인사정을 들어 간곡히 거절했지만 당시 최대표 뜻을 따르지못한 게 지금도 못내 마음에 걸린다.

최대표는 당시 이영자 회장까지 나서 “젊은 여자임원이 회사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일축했다.  회사가 경각의 위기에 놓이자 오너의 권력도 무력해졌다. 

새한그룹은 한치앞도 안보이는 혼란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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