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투데이가 창간한지 얼마되지 않은 때였다. 편집국은 어수선했고,신문도 채 자리를 잡지못했다. 지면은 허술했고, 기사도, 편집도 짜임새가 없었다.

2007년11월13일 화요일. 편집국장으로 있던 나는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따라 아침 편집회의를 국장대리에게 맡기고 점심식사후 1시쯤 귀사했다.

오후1시10분쯤 문화부장이 국장실로 들어왔다. 인터넷판에 연예담당 A기자가 ‘정대선-노현정 아나운서 7월 협의이혼’기사를 단독 특종기사로 올렸다고 보고했다.

그 시간, 기사는 포탈을 통해 전파되면서 아시아투데이 인터넷은 접속마비로 순식간에 다운됐다. 아시아투데이는 실시간 포탈검색순위 1위를 기록했다. 노현정이혼기사는 장안의 화제거리가 됐다.

담당부장은 나에게 ‘담당기자가 미국현지에서 정대선의 먼친척을 통해 취재한 기사로 신뢰할만한데 객관적 사실이 부족하다’고 했다. 표정이 어딘가 자신감이 없어보였다.

파문이 너무 커져 무언가 직감이 좋지않았다. 문화부장에게 기사를 가져오라고 지시하고 기사를 면밀히 살펴봤다. 기사일부내용에 문제될 소지는 있었지만 당시 100% 오보로 판단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담당기자를 불러 ‘취재원이 어디냐’고 묻자 ‘정대선-노현정부부가 살고 있는 미국현지에 있는 남편 정대선씨의 먼친척으로부터 전날 밤 확인했다’고 자신있게 답변했다.

하지만 나는 이혼서류를 확인했느냐고 묻자 미처 확인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때 정대선씨 친구가 편집국에 찾아와 오보라고 강력히 항의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기자를 믿노라면서 정대선씨 친구를 돌려보냈다.

기사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법조팀이 없는 아시아투데이로서는, 회장으로 있던 전 헌번재판관 출신 송인준 변호사에게 정씨부부의 이혼서류 접수여부를 법원에 확인해줄 것을 요청했다. 오후3시쯤 송회장으로부터 이혼서류접수가 안된 것 같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담당부장과 담당기자를 불러 호적상 이혼서류 등 객관적 사실이 더 확인될때까지 인터넷기사는 물론, 다음날 예정된 조간신문기사도 일단 보류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온라인담당자에게 인터넷판에 올린 이혼기사를 내리라고 지시했다.

나는 담당부장에게 즉시 노현정씨 어머니에게 사실확인을 지시했고 노씨어머니는 이혼사실을 강력히 부인했다. 어머니는 “잘살고 있는 딸을 왜 흔들어대냐”는 식으로 원망했다.

이날 저녁 여의도의 한 식당에 들어가자 손님들은 노현정부부의 이혼기사를 안주거리삼아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띠었다. 파문은 커졌다.

나는 호적상 이혼서류가 확인되지 않은 게 너무 찜찜했다. 담당기자가 갈수록 취재원에 대해 횡설수설했다. 나는 일단 오보로 판단했다.

11월17일 정대선씨가 이사로 있는 현대자동차 계열의 BNG스틸을 방문해 총무팀장을 만났다. 이날 1면에 정정기사와 함께 사과기사를 실었다.

그후 담당기자를 불러 취재원을 밝히라고 누차 추궁하자 담당기자가 증권가에서 나돈 루머를 누군가로부터 듣고 확인없이 기사화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할말을 잃고 말았다.

얼마후 회사로 고소장이 날라들었다. 정대선씨 부부가 명예훼손으로 대표이사,편집국장,담당기자를 민·형사 고소한 것이다. 고소장에는 성북동 정씨 어머니집 주소에 정씨부부가 함께 있는 등본을 첨부했다.

예상대로 기사는 오보였다. 참담했다. 나는 27년 기자생활에 가장 치욕스러운 날이었다.

정정보도와 함께 정대선씨에게 여러차례 사과를 한뒤 나는 기사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해 12월 사표를 냈다.

당시 정씨부부는 보스톤에 유학중이었다. 대신 형인 정의선 사장을 만났다. 현대자동차 사장을 지낸 전 민주당 이계안의원까지 중재에 나섰다. 형은 당사자일은 아니지만 동생과 어머니를 설득하겠다고 했다.

담당부장, 기자가 그 후에도 정씨부부에게 여러차례 사과편지를 보냈다.

고소취하를 기다리면서 수사를 늦춰온 검찰은 고소인의 취하가 없자 수사를 본격 시작했다. 

사안이 가당치않은듯 조기 종결을 기대했던 담당수사관은 “고소인이 있어 조사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수사가 시작되자 정씨회사 총무팀장은 사태수습을 일찍 매듭지으려고 정씨에게 메일을 보내고, 어머니에게 고소취하를 설득했다가 오히려 오해받아 한동안 지방으로 발령받아 내려가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고맙고 미안했다. 그는 몇 개월후 다시 서울로 발령받아 올라오기는 했지만.

당시 소송을 대리했던 총무팀장은 우리측이 순발력있고 성의있게 정정기사에다 사과기사를 게재했고, 사표까지 내자 더 이상 피해를 줄이기위해 고소취하 ‘건의’를 했다가 ‘괘씸죄’ 불똥이 튄 것이다.

사실 정씨 회사 어느 누구도 감히 역풍불까 ‘황태자’문제에 대해 끼어들지 못했다. 그 만큼 오너집안문제여서 풀기가 까다로웠다.

검찰은 담당부장, 담당기자를 부른 뒤 나를 불렀다. 나는 녹화영상실에서 조사관의 조사를 2차례 받았다. 담당부장과 기자는 서로 진술이 엇갈리자 대면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그해 12월말 정대선씨가 집안일로 잠시 귀국했다.

나는 정씨 회사 총무팀장 주선으로 부장과 기자를 대동하고 정대선씨를 만나 사과했다. 정대선씨는 이혼기사보다도 기사내용이 더 문제라고 감정이 격해 털어놨다.

“이혼이야 안했으면 그만 아닌가요. 그런데 기사문제로 결혼 후 처음 아내하고 부부싸움까지 했습니다.”

정씨는 겸손하면서 단호했고 당당했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손자다웠다.

사실 기사내용이 더 문제였다. 어떻게 이런 기사가 거르지도 않고 보도됐는지···. 자괴심, 회의가 스쳐갔다.

무엇보다 기사중에 ‘정대선씨가 명문 K대를 기부입학으로 들어갔다’는 기사가 문제였다. 기사만 보면 마치 정씨가 뒷돈주고 대학을 입학한 것으로 오인받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기부입학은 불법으로 확인할 수 없는데다 기사자체가 명예훼손되기에 충분했다. 여기서 사태가 꼬여갔다.

당사자들은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기사화에는 금도가 있는 법인데···. 담당부장과 기자를 불러 꾸짖었지만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난 뒤였다. 사과하고 책임질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 기사로 인해 정씨는 주변에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었다고 했다. 정씨 어머니도 이 기사로 단단히 화가 나 있다는 회사측 전언이 있었다.

검찰이 단죄한다고 해도 할말이 없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정씨 회사측도 입장이 난처한 분위기였다. 검찰이 대학 입학증을 요구하는 등 사실확인에 나서면서 곤혹스러워했다.

검찰은 그간 정씨부부를 불러 고소인 조사를 하려했지만 출석하지 않다가 12월말 귀국하자 정씨만 불러 조사했다. 그는 5시간여동안 피고인보다 훨씬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그날따라 서울도심은 폭설이 내렸다.

정씨 어머니는 아들에게 “네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검찰에 나가 수사받는 곤욕을 치러야 하는냐”고 역정을 냈다는 후문도 들렸다.

초초하게 지켜보던 검찰수사결과가 나왔다. 2008년 4월 대표이사와 편집국장, 담당부장은 무혐의처분을 받았다. 담당기자는 불구속기소돼 재판에 넘어갔다.

담당기자의 재판일정이 잡히자 정씨측 변호사가 고소를 취하한다고 알려왔다. 6개월 이혼오보 파문은 막을 내렸다.

후일 나는 함께 회사를 떠난 담당부장에게 이번 오보소동이 정씨부부에게는 피가 되고 살이 될 거라고 우스개소리를 했다.

“오보사건으로 정씨부부가 앞으로 이혼하고 싶어도 못할거다. 오보기자에게 감사장이라도 줘야하는 것 아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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