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8일은 27회 ‘약의 날’이다.약사법 제정을 기념하면서 국민건강을 수호하는 의약품의 가치를 인식하고 약업인의 사명감을 다짐하자는 뜻에서 만든 날이다.

 한국제약협회에 몸담고 있는 제약인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제약산업이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의약주권의 보루라는 점에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정부에서도 제약산업의 가치와 비전에 대한 확신을 갖고 2020년 세계 7대 제약강국을 만들겠다며 다양한 육성지원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활발한 연구개발(R&D) 투자와 의약품 수출을 비롯한 글로벌 제약시장 공략에 노심초사하고 있는 제약업계로서는 정부의 의욕적인 지원으로부터 큰 힘을 얻을 수 있기에 기대가 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요즘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되지 않는 논의들이 오가고 있어 답답하기 그지없다. 제약산업이 연구개발과 글로벌 진출에 많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지원한다고 했는데 정작 현실에서는 R&D 투자 여력과 해외시장 개척역량을 떨어뜨리는 정책이 검토되고 있어서다.

이런저런 사안들이 있지만 대표적인 것이 시장형 실거래가제(저가구매 인센티브제)이다. 이 제도는 병원이나 약국 등 요양기관이 의약품을 건강보험에 규정된 가격보다 싸게 구매하면 그 차액의 70%를 병원에 인센티브로 주도록 돼있다. 이렇게 구매 과정에서 가격이 내린 의약품은 다음해에 그만큼 보험약가가 내려간다. 시장형 실거래가제는 2010년 10월부터 16개월 동안 시행됐지만 지난해 약가일괄인하 등으로 제약산업이 입을 피해를 고려해 지난해 2월부터 내년 1월까지 2년간 시행이 유예된 상태다.

그런데 복지부가 내년 2월부터 이 제도를 시행할지 말지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이 제도의 재시행에 대해서는 우리 제약업계뿐 아니라 대한약사회와 도매협회 등은 물론 시민사회단체에서도 한 목소리로 반대하고 있다.

시장형 실거래가제의 장·단점을 논의하기에 앞서 이미 이 제도는 정책 시행의 목표 달성 가능성과 정당성이 사라졌다고 본다. 제도를 시행할 당시인 2010년의 약가와 2013년 현재의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 상황에서 이 제도를 시행할 아무런 이유도, 실익도 없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2010년 당시 100%이던 약값은 2012년 4월 일괄 약가인하와 2011년 이후 3년간 건강보험에 등재된 보험의약품의 목록 재정비에 따른 약가인하 등으로 그 절반(53.55%) 수준으로 완전히 떨어졌다.

앞으로 출시될 의약품 역시 특허만료 후 동일한 53.55% 수준으로 떨어지도록 하는 약가제도가 작동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일괄인하와 기등재 목록정비 등으로 지난 3년 사이에 2조5000억원 상당의 약가가 인하됐다. 그렇게 제약업계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약가인하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마당에 이 제도를 3년 전 약가 수준만을 생각하고 다시 시행하는 것은 정상적인 결정이라고 볼 수가 없다.

이 제도 시행 당시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따져보아도 하나 둘이 아니다. 이재현 성균관대 약대 교수는 지난 6일 열린 27회 약의 날 기념 시장형 실거래가제 제도 토론회에서 분석 결과 드러난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발표한 바 있다.

당시 시장형 실거래가제 시행기간 중 지급된 전체 인센티브 2399억원 중 91.7%인 2143억원이 대형병원에 지급됐고, 병원은 6.4%, 의원은 1.7%, 약국은 0.1%에 지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종합병원 등 대형병원에 대한 음성적인 리베이트를 합법화해주는 것과 마찬가지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했다. 1원 낙찰 문제 역시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제도 시행시기인 2010년 10월부터 2011년 9월까지 1원 낙찰 품목은 2515품목으로 시행 직전의 같은 기간에 비해 47.5%나 증가했다는 것이 이재현 교수팀의 진단이었다.

기본적으로 시장형 실거래가제는 수요와 공급에 의한 시장가격이 아니라 의약품의 가격 덤핑을 강요하는 제도라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

역설적이게도 비정상적인 거래를 압박하는 반시장적 발상에서 나온 제도가 아니냐는 것이다. 특히 주로 병원 입원환자용 의약품을 공급하는 일부 경쟁력 있는 제약기업이 집중적인 피해를 입는다는 점은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이미 세계시장에 나가 블록버스터급 신약을 준비하고 있는 회사들의 연구개발에 차질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세계 7대 제약강국 실현을 한낱 구호로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무작정 재시행을 고집하기보다 다시 한 번 재고해주길 바란다.

시장형 실거래가제에 대한 폐지 요구를 단지 제약업계의 목소리만으로 치부해서는 안될 일이다. 정부 측을 제외하고 약사회와 도매협회, 법조계와 시민단체 등 각계에서 이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6일 열린 토론회에서 "정부가 시장형 실거래가제를 내년부터 다시 시행하겠다는 것은 칼자루를 쥔 슈퍼갑에게 권총을 한 자루 더 얹어주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박정관 한국의약품도매협회 이사의 지적이 지금도 생생하다.

무릇 정책의 합리성을 잃으면 정책의 권위도 약화되고, 그러면 정부도 신뢰와 더불어 권위도 잃게 마련이다. 이미 다른 제도를 통해 정책목표를 달성해버린 제도, 음성적 리베이트의 합법화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시장형 실거래가 제도를 더 이상 고집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라고 본다.

제약산업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신약개발을 위한 R&D에 투자해야 할 돈이, 글로벌 진출을 위해 활용해야 할 재원이 대형병원의 인센티브로 지급되고 있는 현실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정부와 정책 당국자들의 합리적인 결정을 기대한다. <한국제약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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